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외젠 드 보아르네 (문단 편집) === 전반부 === 귀족 집안의 적자로 잘먹고 잘 살다가 그의 아버지가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때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게 된 것을 계기로 가문의 몰락이 시작되는 듯했지만... 외젠의 누이동생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의 회고에 의하면, 외젠은 정부에 강탈당한 아버지의 칼을 되찾기 위해 당시 한창 명성을 떨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전쟁의 천재]]를 찾아갔는데, 이때 외젠의 행동에 깊은 감동을 받은 나폴레옹은 아예 직접 칼을 가지고 보아르네 저택을 방문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외젠의 어머니이자 보아르네 장군의 미망인 조제핀과 사랑에 빠지면서 1796년 3월 결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부 국내판 나폴레옹 위인전에도 실려 있는 일화.[* 이는 훗날 나폴레옹이 각색한 이야기라는 설이 유력하다.] 남매는 처음에 촌스러운 아저씨가 계부가 된 것을 싫어했다고 하나 나폴레옹은 외젠과 오르탕스를 자신의 양자로 거두고 애정과 관심을 쏟아주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경험이 있는 나폴레옹과 의붓자식들은 곧 친해졌고, 외젠은 1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의 참모가 되었으며 1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빠르게 실전 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다만 이는 오르탕스의 어머니 조제핀이 바라스의 정부였다가 나폴레옹의 아내가 된 것에 대한 세간의 가쉽(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직이 바라스가 옛 정부를 나폴레옹에게 떠넘기기 위한 [[지참금]]이었다던가)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므로 가감해서 볼 필요는 있다.] 1798년의 이집트 원정에도 종군했으며 생 장다르크(아크레)에서 부상당했고 1799년 8월 의붓아버지와 함께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 후 나폴레옹이 브뤼메르 쿠데타로 통령의 자리에 오르자 통령 경호 엽기병대의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그렇게 털리고도 정신 못 차리는 오스트리아를 관광태우러 [[제2차 이탈리아 전쟁]]에 나섰을 때도 종군했으며, [[마렝고 전투]]에서는 자신의 엽기병대를 지휘하며 용감하게 싸웠다. 외젠은 처음엔 조제핀의 재혼을 탐탁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폴레옹은 외젠에게 친아버지 이상으로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었다. 사실 비교하기도 뭣한 게 외젠의 친아버지 알렉상드르는 가족을 아끼긴 커녕 아내를 촌뜨기라고 후려치고 자식들은 방치한 채 애인들과 놀아나고 아내에게 누명을 씌우려다 역습당해 공개 석상에서 개망신당한 인물이다. 즉 아버지로서는 0점인 인간. 특히 이집트에서 조제핀의 바람기를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준 나폴레옹[* 다만 휘하 장교의 아내 폴린 푸레스와 맞바람을 피우기는 했다(...).]에 감동해 어머니에게 당장 애인과 헤어져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영국군에게 압류당한 탓에 전해지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영국에서 그 편지를 공개해 나폴레옹의 마누라가 바람났다는 것이 유럽 전체에 알려지는 바람에... 나폴레옹은 이집트에서 귀국한 직후 조제핀과 이혼하겠다고 씩씩거리며 쫓아왔지만 외젠과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오르탕스]]의 눈물어린 호소에 이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이때 상황 자체가 나폴레옹이 이혼한다면 나폴레옹 자신에게도 정치적인 치명상이 될 상황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조제핀이 (나폴레옹의 인기가 최고 자리에 도전해도 될만해진 것 같기도 해서) 정신차리고(?) 바람기가 사라져 부부 생활도 안정되었다. --문제는 이제부턴 거꾸로 나폴레옹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1804년에 프랑스의 황제에 등극하고 조제핀도 황후가 되었다. 외젠은 나폴레옹의 친자식은 아니기 때문에 계승권은 없었으나 나폴레옹의 든든한 지지 속에 순혈 황족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프란츠 2세가 3차 대불동맹을 일으키자 외젠은 다시 의붓아버지를 따라 전쟁에 종군하였다. 이때도 훌륭한 공적을 많이 세우며 순조롭게 승진해 나갔고 이후 벌어진 4차 대불동맹 전쟁에서는 이미 이탈리아 군단의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참고로 이때 외젠의 나이는 고작 '''24세'''. 아무리 군공이 있고 나폴레옹의 군사원수들이 젊은 편이라곤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지나치게 어린 편인데 나폴레옹도 실력은 둘째치고 나이 탓에 주변의 불만이 생길거라 느꼈는지 [[자크 마크도날]] 원수를 군사고문으로 붙여주었다. 그리고 1806년(외젠 25세 당시) 나폴레옹은 이제까지의 공적을 치하할 겸 외젠을 이탈리아의 부왕으로 임명하였고 바이에른 왕 막시밀리안의 딸 아우구스테 공주와 결혼까지 주선했다.[* 이때 아우구스테 공주는 이미 바덴의 대공 카를의 약혼녀였는데 나폴레옹이 파혼시키고 외젠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다만 카를에게도 자신이 입양해 가족처럼 대우한 외젠의 사촌 여동생 [[스테파니 드 보아르네]]와 결혼시켜 보상해주었다. 아우구스테와 외젠의 결혼생활은 별다른 잡음없이 좋았다.] 이후 이탈리아 방면에서 주둔하게 되어 비교적 한산하게 세월을 보내는 듯했다. 1809년 나폴레옹은 결국 조제핀과의 이혼을 결심했지만, 이후에도 외젠과 여동생 [[오르탕스 드 보아르네|오르탕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나중의 [[나폴레옹 3세]]의 어머니. 오르탕스는 사실상의 이혼 상태에서 플라오 백작(실제 아버지는 탈레랑이라는게 정설이다)과 밀통하여 모르니 (자칭) 백작을 낳았다. 나중에 모르니는 이부형인 샤를 루이 나폴레옹을 도와서 제2제국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여러 장관직을 거친 후 모르니 공작이라는 진짜 작위를 받았다. 모르니는 극작가로도 활동했는데 다작에 비해서 작품의 질은 그저 그렇다는 평이고 연극계에서의 진짜 업적은 19세기의 대 여배우인 사라 베르나르를 발굴한 것이라고 한다.]를 보호했으며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다. 조제핀은 이혼 조건으로 외젠을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부왕에서 이탈리아 왕으로 높이는 것을 내걸었으나 외젠은 무슨 개수작이냐면서 열을 내며 반대했다. 나폴레옹의 가족들 중에서는 가장 개념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